5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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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5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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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시장은 화순 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전통시장이다. 화순시장은 5일에 한 번씩 장이 개설되는 정기시장으로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농산물과 특산물을 비롯해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거래하고 있다.

현재 화순 지역에 개설되어 있는 시장은 화순시장, 춘양시장, 이양시장, 능주시장, 동복시장, 사평면시장 등 6개이다. 이들 시장은 해방 이후에 생긴 춘양시장을 빼고는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시장들이다. 이들 시장들은 상설 점포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장이 개설되고 있다.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재래시장 시설 현대화 사업으로 화순고인돌시장과 능주시장에 새롭게 단장된 모습으로 이용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화순 5일장 현황
화순고인돌전통시장춘양재래시장이양재래시장
전남 화순군 화순읍 시장길 42
개장일 : 3일, 8일
전화 : 061-375-0330
전남 화순군 춘양면 강변길 19-5
개장일 : 2일, 7일
전화 : 061-370-1355
전남 화순군 이양면 이양로 29-12
개장일 : 4일, 9일
전화 : 061-370-1605
능주전통시장동복재래시장사평면재래시장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동길 3-1
개장일 : 5일, 10일
전화 : 061-372-1178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동복시장길 19
개장일 : 2일, 7일
전화 : 061-370-1353
전남 화순군 사평면 사평길 30
개장일 : 5일, 10일
전화 : 061-370-1351
화순 시장의 역사
화순시장
화순은 1896년 능주와 동복, 화순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생겨난 도시이다. 일반적으로 농토가 많은 전라남도의 특성과 달리 산지가 많아 농산물보다는 임산물이나 광산물 생산이 많은 지역이다. 수로 교통이 발달했던 조선시대에는 수량이 풍부한 동복천 주변에 개설된 시장들을 통해 물산이 교류되었고, 육로 교통으로 변화한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화순과 능주의 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다.

화순에는 조선시대부터 시장이 많이 개설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화순장을 비롯해 7개의 장이 섰고, 조선 말기에 5개로 줄었다가 일제강점기 때 다시 7개가 되었다. 해방 이후 한때 11개의 시장이 개설되기도 했지만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시장이 줄었다. 2016년 현재 모두 6개의 정기시장이 각각의 장날에 열리고 있다.

화순의 시장들은 1990년대까지 계절마다 달라지는 곡물이나 과일, 채소 등과 지역의 특산물을 거래하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2000년대 들면서 유통 구조의 변화와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의 변화로 인해 크게 위축되었고, 교통의 발전으로 13km 떨어진 광주의 상권에 잠식당하면서 화순시장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활기를 잃은 상태이다.
화순 지역의 특색과 시장의 형성 과정
“풍속이 소박하고 간략하나 원래부터 두터웠고, 산세는 순수한 정기를 감추었으니 발설하기 더디네”
이 시는 조선 초기의 문인이었던 허종이 화순객사에 머물 때 화순을 노래한 것이다. 화순은 허종의 시처럼, 또한 화순(和順)이라는 이름처럼 조화롭고 순박한 땅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소백산맥에서 뻗은 지맥들로 형성된 산악 지대이다. 서부에 펼쳐진 하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400~900m에 이르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탓에 곡창 지대라는 일반적인 전라남도의 특성과 달리 예부터 농업보다는 약초나 임산물의 생산이 많았다. 지하자원도 풍부해 특히 무연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배경과 더불어 화순을 상징하는 것은 운주사이다. 이 사찰은 누가 조성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은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으로 유명하다. ‘누워 있는 불상이 일어나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라는 예언이 전해지는 와불을 비롯해 절 도처에 즐비한 탑과 불상을 보면 마치 산 속 깊은 곳에서 내밀한 염원을 키우고 있는 땅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순은 전국을 떠돌며 방랑하던 시인 김삿갓이 숨을 거둔 곳으로 유명하다. 그것도 시장이 열리는 동복장이 김삿갓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 곳이었다. 동복장은 조선시대의 문헌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장이었다.

조선시대의 기록인 《동국문헌비고》(1770)를 보면 오늘날의 화순 지역에는 7개의 시장이 나타난다. 화순 읍내장(3, 8일)을 비롯해서 동복 읍내장(1, 6일)과 방석장(2, 7일), 사평장(5, 10일), 남점장(4, 9일), 능주 읍내장(3, 8일)과 이양장(4, 9일)이 그것이다.

또한 화순군의 정기시장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동복구지》와 《능주지(綾州誌)》(연대 미상)에 따르면 조선시대 후반 화순군에는 읍내면 천변리에 천변장(2, 7일), 외북면에 원촌장(3, 8일), 내서면 도서리에 석보장(4, 9일), 도림면 이양리에 이양장(4, 9일), 외사평면 사평리에 사평장(5, 10일), 능주 읍내장(5, 10일)이 개설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동국문헌비고》와 위의 문헌들에 개설된 시장들이 서로 차이를 보이는 것은 화순 지역의 행정구역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탓이 크다. 화순 지역은 화순과 동복, 능주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들은 자주 통합되거나 분리되었다. 화순과 동복, 능주라는 3개의 군이 화순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된 것은 1896년이었다. 여기에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인근 창평군, 남평군, 광주군의 일부가 화순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화순 지역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과 지리적 환경을 고려해볼 때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화순 지역은 화순 읍내장, 능주장, 이양장, 동복장, 이서장, 사평면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상권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동복군과 화순군 사이에 산들이 경계를 이루고 있어 서로 왕래하기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수로 교통 또한 지석천을 중심으로 한 영산강 권역에 속한 화순과 능주와 달리 동복은 섬진강의 지류인 동복천을 중심이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동 상인들의 순환 경로 또한 둘로 나뉘었을 것이다.

실제로 화순의 시장과 동복의 시장은 거래 품목에서도 조금 차이가 났다. 화순의 시장에서는 쌀과 면화, 면포, 마포, 종이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하지만 동복의 시장은 쌀, 콩, 보리부터 유기, 자기, 토기 등을 주요 거래 품목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 동복천은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영산강보다 지류가 훨씬 넓게 퍼져 있어 물산의 교류가 활발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교통이 수로에서 육로 중심으로 바뀌면서 동복 지역의 시장들이 위축되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 거래액을 통해 살펴보면 동복천보다는 지석천을 중심으로 한 화순장과 능주장, 능주에 속한 이양장의 규모가 훨씬 컸다. 이때 능주에 용강장(2, 7일)이 새로 생기고, 석보장은 이서장으로, 사평장은 사평면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들 가운데 이서장은 누에로 유명했다. 이서장이 섰던 야사마을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누에를 치기 시작해 1980년대까지 주민의 90%, 2010년대에도 주민의 80%가 잠업에 종사할 정도로 누에를 많이 치고 있다. 따라서 일대가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로 무성하고 뽕나무 가루를 넣어 만든 뽕엿은 이 지역 특산물로 꼽힌다. 야사마을은 2011년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3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1920년대 화순장에 개설되어 있던 상설점포는 모두 29개였다. 그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잡화점(22)이었고 양복점(3), 과자점(4)이 뒤를 이었다. 잡화나 양복, 과자 등은 주로 일본인들이 팔았던 점을 고려해보면 당시 화순장의 정기시장은 한국인들이, 상설점포는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2년에 능주에 도암장이 개설되고, 해방 이후에 춘양장이 새로 개설되었다. 하지만 도암장은 1992년에 공식적으로 소멸되었고, 춘양장은 겨우 명맥만 잇고 있다.

일제강점기까지 화순 지역의 시장 변화를 살펴보면 《동국문헌비고》에 7개의 시장이 기록되어 있고 《임원경제지》에 6개의 시장, 1872년의 《군현지도》에는 5개의 시장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다시 7개로 증가했다.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해방 이후 화순 지역의 시장은 일제강점기보다 조금씩 늘어났다. 1953년에는 2개가 늘어 모두 9개의 정기시장이 개설되어 있었고, 1959년에 11개로 늘어났다. 이런 상황은 한국전쟁 이후 전후 복구와 인구의 증가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79년의 조사에서는 여전히 상설시장이 없었고, 정기시장도 3개가 줄어 8개만 개설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10년 뒤인 1989년의 조사에서도 변함이 없다. 이런 현상은 1970년대에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전국적으로 농촌 인구가 감소하고, 시장의 수가 줄어드는 기존의 시장 소멸 패턴과 유사하다. 또한 1989년까지 상설시장이 개설되지 않았다는 것은 인근에 있는 광주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화순군은 광주시와 불과 1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더구나 1990년대 대형마트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광주와 화순, 광주와 능주, 광주와 사평리를 오가는 기차와 버스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순의 정기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물품들은 광주에서 구입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개인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대형마트가 등장하면서 광주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이와 반비례해 화순 지역의 전통시장들은 더욱 위축되기 시작했다. 또 유통 구조의 변화에 따라 슈퍼마켓과 편의점들이 생기면서 전통시장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2016년 현재 화순 지역에 개설되어 있는 시장은 화순시장, 춘양시장, 이양시장, 능주시장, 동복시장, 사평면시장 등 6개이다. 이들 시장은 해방 이후에 생긴 춘양시장을 빼고는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시장들이다. 이들 시장들은 상설 점포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정기시장을 중심으로 장이 개설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순시장 (국내 시장백과, 이경덕, 박재영, 가디언 출판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