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조선 초기의 문인이었던 허종이 화순객사에 머물 때 화순을 노래한 것이다. 화순은 허종의 시처럼, 또한 화순(和順)이라는 이름처럼 조화롭고 순박한 땅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소백산맥에서 뻗은 지맥들로 형성된 산악 지대이다. 서부에 펼쳐진 하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400~900m에 이르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탓에 곡창 지대라는 일반적인 전라남도의 특성과 달리 예부터 농업보다는 약초나 임산물의 생산이 많았다. 지하자원도 풍부해 특히 무연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배경과 더불어 화순을 상징하는 것은 운주사이다. 이 사찰은 누가 조성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은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으로 유명하다. ‘누워 있는 불상이 일어나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라는 예언이 전해지는 와불을 비롯해 절 도처에 즐비한 탑과 불상을 보면 마치 산 속 깊은 곳에서 내밀한 염원을 키우고 있는 땅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순은 전국을 떠돌며 방랑하던 시인 김삿갓이 숨을 거둔 곳으로 유명하다. 그것도 시장이 열리는 동복장이 김삿갓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 곳이었다. 동복장은 조선시대의 문헌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장이었다.
조선시대의 기록인 《동국문헌비고》(1770)를 보면 오늘날의 화순 지역에는 7개의 시장이 나타난다. 화순 읍내장(3, 8일)을 비롯해서 동복 읍내장(1, 6일)과 방석장(2, 7일), 사평장(5, 10일), 남점장(4, 9일), 능주 읍내장(3, 8일)과 이양장(4, 9일)이 그것이다.
또한 화순군의 정기시장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동복구지》와 《능주지(綾州誌)》(연대 미상)에 따르면 조선시대 후반 화순군에는 읍내면 천변리에 천변장(2, 7일), 외북면에 원촌장(3, 8일), 내서면 도서리에 석보장(4, 9일), 도림면 이양리에 이양장(4, 9일), 외사평면 사평리에 사평장(5, 10일), 능주 읍내장(5, 10일)이 개설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동국문헌비고》와 위의 문헌들에 개설된 시장들이 서로 차이를 보이는 것은 화순 지역의 행정구역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탓이 크다. 화순 지역은 화순과 동복, 능주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들은 자주 통합되거나 분리되었다. 화순과 동복, 능주라는 3개의 군이 화순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된 것은 1896년이었다. 여기에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인근 창평군, 남평군, 광주군의 일부가 화순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화순 지역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과 지리적 환경을 고려해볼 때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화순 지역은 화순 읍내장, 능주장, 이양장, 동복장, 이서장, 사평면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상권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동복군과 화순군 사이에 산들이 경계를 이루고 있어 서로 왕래하기 힘들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수로 교통 또한 지석천을 중심으로 한 영산강 권역에 속한 화순과 능주와 달리 동복은 섬진강의 지류인 동복천을 중심이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동 상인들의 순환 경로 또한 둘로 나뉘었을 것이다.
실제로 화순의 시장과 동복의 시장은 거래 품목에서도 조금 차이가 났다. 화순의 시장에서는 쌀과 면화, 면포, 마포, 종이 등이 주로 거래되었다. 하지만 동복의 시장은 쌀, 콩, 보리부터 유기, 자기, 토기 등을 주요 거래 품목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 동복천은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영산강보다 지류가 훨씬 넓게 퍼져 있어 물산의 교류가 활발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교통이 수로에서 육로 중심으로 바뀌면서 동복 지역의 시장들이 위축되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때 거래액을 통해 살펴보면 동복천보다는 지석천을 중심으로 한 화순장과 능주장, 능주에 속한 이양장의 규모가 훨씬 컸다. 이때 능주에 용강장(2, 7일)이 새로 생기고, 석보장은 이서장으로, 사평장은 사평면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들 가운데 이서장은 누에로 유명했다. 이서장이 섰던 야사마을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누에를 치기 시작해 1980년대까지 주민의 90%, 2010년대에도 주민의 80%가 잠업에 종사할 정도로 누에를 많이 치고 있다. 따라서 일대가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로 무성하고 뽕나무 가루를 넣어 만든 뽕엿은 이 지역 특산물로 꼽힌다. 야사마을은 2011년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3호로 선정되기도 했다.
1920년대 화순장에 개설되어 있던 상설점포는 모두 29개였다. 그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잡화점(22)이었고 양복점(3), 과자점(4)이 뒤를 이었다. 잡화나 양복, 과자 등은 주로 일본인들이 팔았던 점을 고려해보면 당시 화순장의 정기시장은 한국인들이, 상설점포는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2년에 능주에 도암장이 개설되고, 해방 이후에 춘양장이 새로 개설되었다. 하지만 도암장은 1992년에 공식적으로 소멸되었고, 춘양장은 겨우 명맥만 잇고 있다.
일제강점기까지 화순 지역의 시장 변화를 살펴보면 《동국문헌비고》에 7개의 시장이 기록되어 있고 《임원경제지》에 6개의 시장, 1872년의 《군현지도》에는 5개의 시장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다시 7개로 증가했다.